아비정전
아비정전 — 멈출 수 없는 청춘, 사랑도 떠나는 법을 배운다
“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… 너랑 나, 그때 1분을 함께 했어.
그건 내가 잊지 못할 1분이야.”
왕가위 감독의 1990년 작품 《아비정전》은 단순히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.
이 영화는 떠도는 사람들의 외로움, 그리고 붙잡히지 않는 청춘의 정서를 가장 우아하면서도 쓸쓸하게 그려낸 시간의 조각이다.
그리고 그 중심에는, 멈출 수 없는 한 남자 — 아비(장국영)가 있다.
아비, 그를 따라가는 100분의 슬픔
아비는 잘생겼고, 매력적이며, 여자를 유혹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.
그는 술집에서 일하는 수리(장만옥)를 손쉽게 유혹하고, 그녀의 마음이 깊어질 무렵엔 덤덤하게 이별을 말한다.
“넌 이미 내 여자였어. 1분 동안.” 그가 말하는 ‘1분’은 그에겐 그저 기억의 표식, 수리에겐 모든 감정의 시작이었다.
하지만 아비는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, 아무에게도 머물 수 없다.
그는 태어나면서부터 ‘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는 남자’였고, 그 정체성의 공허함은 결국 모든 관계를 스스로 끊어내는 방식으로 표출된다.
아비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
수리 (장만옥) — 떠나간 사랑의 유령
수리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성이다.
아비를 사랑하지만, 그 사랑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안다.
아비에게 차인 후 그녀는 망가진다.
그리고 긴 시간을, 말없이 그리움과 함께 살아간다.
경찰 차오 (유덕화) — 말 못한 감정의 그림자
차오는 수리에게 조용히 다가와주는 남자다.
하지만 수리의 마음이 아비에게 가 있음을 알고, 조용히 물러난다.
그의 감정은 한 번도 고백되지 않지만,
그의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진심에 가까웠다.
미미 (유가령) — 아비와 같은 그림자
미미는 아비의 또 다른 연인이자, 어쩌면 그를 가장 닮은 여자다.
사랑에 집착하고, 그를 위해 모든 걸 던지려 한다.
하지만 아비는 그녀도 떠난다.
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, 그를 욕하지 않는다.
마치, 자신도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사람임을 아는 듯.
아비의 끝, 정전(靜電)처럼 사라지다
영화의 마지막, 아비는 결국 진짜 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.
그러나 그녀는 그를 만나길 거부하고,
그는 다시,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된다.
총격 사건.
마지막 기차.
그리고 죽음.
아비는 “끝내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 남자”로 조용히 사라진다.
죽음조차, 영화는 담담하게 그린다.
그는 떠났고, 남은 이들은 그의 기억만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.
아비라는 시간, 아비라는 감정
《아비정전》은 왕가위 세계관의 시작점이다. 이후 《중경삼림》, 《화양연화》, 《2046》까지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,
이 영화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슬픈 감정의 원형처럼 존재한다.
아비는 결코 악인이 아니다. 그는 상처 입은 채,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만,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없었던 사람이다.
그래서 그는 언제나 떠난다. 그리고 우리도 그와 함께, 그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를 이해하게 된다.
발 없는 새
아비는 늘 떠돌고, 머무르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. 그가 마치 “발 없는 새”처럼,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끝없이 날아다니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.
발 없는 새는 땅에 내려앉을 수 없기에 언제나 하늘을 날며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. 아비도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, 진정한 ‘집’을 찾지 못해 끝없이 헤매고,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머물지 못한다.
이 상징은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결핍과 외로움을 보여준다.
그는 자유로워 보이지만, 사실은 깊은 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는 한 남자의 슬픈 초상이다.
그래서 아비정전에서 ‘발 없는 새’는 “붙잡히지 않는 존재”, “떠도는 청춘”, 그리고 “끝내 닿지 못하는 사랑”의 메타포로 작용한다.
‘당신의 청춘은 어디에 멈췄나요?’
《아비정전》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어떤 장면보다도, 그 ‘1분’의 대사가 오래 남는다.
“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...”
그 짧은 순간이 영원의 상징이 되는 영화.
붙잡을 수 없는 사람, 붙잡고 싶은 기억, 그리고 끝내 도달하지 못한 사랑에 대해 말해주는 영화.
《아비정전》은, 지나간 청춘과 그 시간의 그림자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.